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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3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 ‘석학(碩學) 이어령’의 휴먼다큐 프라임
임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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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에서 언론인, 교수 그리고 초대 문화부장관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 ‘석학(碩學) 이어령’의 휴먼다큐 프라임


(리뷰) 지난달 24일에 개최한 ‘세계문자심포지아 2014’ 개막식 기조강연에 선 이어령 박사는 “문자의 운명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기로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인쇄술 이후 또 한 번 디지털 기술에 의한 문자혁명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회화문자 ‘픽토그램’에서 표의문자 ‘이디오그램’을 거쳐 표음문자 ‘포노그램’의 단계로, 진화가 최근에 역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문화유전자’를 뜻하는 개념으로 내세운 ‘밈’(meme)을 거론하면서 “어떤 문자보다도 세계의 다양한 밈을 포함해 융합하는 데 한글만한 문자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평론가에서 언론인, 교수, 그리고 초대 문화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해 온 그는 한마디로 놀라운 ‘창조자’다. 그의 글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을 뒤집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여든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지적 여정은 쉴 틈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어령의 인생에서 ‘창조’란 어떤 의미일까?

이어령 박사는 1933년 12월 29일 충청남도 아산군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지적호기심을, 어머니에게 문학적 감수성을 물려받았다. 의협심이 강하고 반항 의식이 있던 이어령은 열한 살 때 어머니를 여읜다.

어린 나이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을 안겨준다.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뒷날 그의 의식 속에 하나의 원체험으로 자리 잡는다. 그는 늘 보편적인 사실에서 새롭고 참신한 생각을 이끌어 낸다. 그는 창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특별히 유별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이 다 배우는 천자문을 예로 들어보면,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이것은 하늘은 까맣고 땅은 누렇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 왜 하늘이 까매요? 제 눈에는 파란데?’ 이런 의문들을 품으며 나중에 주역이나 음양오행설을 대하면서 물리적 색채와는 다른 오방색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은 색을 뜻하는 현이 북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고 그 북방에 인간의 생사를 다루는 북극성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나에게 창조성이 있다면 이렇게 남들이 다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사실들을 내 머리로 생각하고 의문을 품고 그것을 끝까지 풀어보려는 나의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1956년 이어령은 평론 「저항의 문학」을 들고 문단에 나온다. 스물셋 젊은 나이의 그는 「저항의 문학」에서 전후 한국 문단에 봉건적으로 군림하고 있던 ‘우상들의 파괴’를 선언한다. 그는 이 글에서 김동리를 ‘미몽(迷夢)의 우상’으로, 모더니즘의 기수를 자처하던 조향을 ‘사기사의 우상’으로, 이무영을 ‘우매(愚昧)의 우상’으로 몰아세운다.

나아가 그는 황순원, 조연현, 염상섭, 서정주 등 당시에 문단을 주도하고 있던 대가들을 ‘현대의 신라인’들로 묶어 신랄하게 비판한다. 기성 문단의 안이성과 공허한 대가 의식을 공격하는 그의 논리는 서구적 수사학으로 단련된 새로운 감각의 한글 문체로 뒷받침된다.

젊은 문학평론가 이어령의 「저항의 문학」과 「화전민의 사상」, 「분노의 미학」, 「수인의 영가」 등은 우상을 깨부수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해머였다. 1963년 8월 12일부터 10월 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하잘 것 없는 단서에서 우리 문화와 의식의 실체를 찾아낸 그의 천부적인 관찰력이 돋보이는 글이다. ‘이것이 한국이다’라는 부제가 딸린, 에세이의 진수를 보여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입체적이며 지성적인 한국론이다.

1963년 <현암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뒤 1년 동안 국내에서만 10만 부가 나가고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진기록을 세운다. 컬럼비아대학교 등에서 동양학 연구 자료로 쓰이기도 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일본 학계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켜 이 책을 읽은 후쿠오카 프로듀서에 의해 「봉선화」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며, 타이완에서는 「기사기풍(欺士欺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 돼 40만 부가 넘게 팔려나갔다.

수년 전만 해도 위정자들은 문화에 대하여 어수룩한 편이었다. 이 어수룩하다는 점이 실은 하나의 장점이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문화에 대한 무관심은 때로 정치적인 차원과 좀 더 다른 문화적인 차원의 그 이원성을 인정해주는 문화의식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원을 비롯하여 오늘날의 정치권력이 점차 문화의 독자적 기능과 그 차원을 침해하는 경향이 있다 할지라도 ‘문화의 침묵’은 문화인 자신들의 소심증에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린애들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막연한 ‘에비’를 멋대로 상상하고 스스로 창조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1982년 그는 일본에서 1년 동안 머물며 연구 생활을 한 뒤 일본 문화를 일본어로 비판한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내놓는다. 일본 사회에 이어령 신드롬을 일으킨 이 책은 한국과 일본에서 쇄를 거듭하며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문화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그는 장관 시절에 ‘문화발전 10개년 계획’을 내놓지만 반응이 냉담해 뜻을 펴지 못한다. 추정 예산 3조 원이 넘는 이 계획은 ‘꿈꾸는 자의 타령’, ‘거품 정책’ 등의 논란을 빚으며, 그저 문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일 정도로 남고 만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문화의 세기’라며 허겁지겁 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지금에 와서 봐도 빈틈없고 앞선 느낌을 준다.

이어령은 기호론에도 관심이 많아 동서 문화,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분석하고 ‘기호학회’까지 창립한다. 그의 강연은 엄청난 독서량과 날카로운 현실 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강연을 할 때 동서고금의 철학자나 문인들의 주옥같은 명구를 남다른 응용력과 상상력으로 걸러 엮어낸 다음 유행어까지 버무려 현실의 맥락과 의미를 꿰뚫는다. 이제는 글이 아니라 말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어령은 한 시대를 풍미한 비평가임이 틀림없다.

이어령 박사가 지금의 세대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세계화 시대에 선 우리,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그는 말한다. “우리가 경쟁해야 할 대상은 한국인이 아닙니다. 바로 이웃에 있는 인구 1억이 넘는 일본, 13억이 넘는 중국과 경쟁하지 않으면, 그리고 이기지 않으면 우리 젊은 세대는 사라집니다. 땀 흘려 산업주의를 만들고, 피 흘려서 민주화를 했는데, 이제는 공감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3대 액체 중에 가장 고결한 남과 공감하는 눈물을 창조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힘이 참 크다는 것, 국가나,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나 혼자하는, 당당한 나의 힘을 믿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80년을 살아 온 선배로서,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입니다. 내 자신을 믿고 남이 아니라 나부터 바꿔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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