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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6

서해경 작가, ‘빛의 시간을 쌓는 템페라’ 느림의 미학으로 내면의 풍경을 그리다

김유위 기자ㅣnews@weeklypeopl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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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경 작가, ‘빛의 시간을 쌓는 템페라’ 느림의 미학으로 내면의 풍경을 그리다 | 위클리피플 인물지식가이드저널
 

사진=서해경 작가 | 템페라 화가

빛의 시간을 쌓는 템페라
느림의 미학으로 내면의 풍경을 그리다


서해경 작가 | 템페라 화가

빛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도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리 없이 머무르며 시간을 견디고, 서서히 스며든다. 한순간 눈부시게 번쩍이는 빛이 아니라, 오래 바라볼수록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는 빛. 서해경 작가의 템페라(Tempera)는 바로 그런 빛의 시간을 닮아있다. 한 겹, 또 한 겹. 눈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얇은 색층이 차곡차곡 쌓이며 점점 깊어진다. 색은 겹쳐질수록 무거워지기보다 오히려 투명해지고, 그 투명함 속에서 고요한 울림이 태어난다. 서해경의 회화는 색을 드러내기보다, 색이 머문 시간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무엇을 ‘본다’기보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바라보게’ 된다.

서해경의 회화는 관람자를 재촉하지 않는다. 의미를 앞세우지도, 감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대신 마음의 속도를 낮추고, 일상의 소음을 잠시 내려놓게 하며,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을 조용히 열어준다. 그 앞에서 우리는 그림을 해석하기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게 그의 템페라는 ‘보는 그림’을 넘어, ‘머무르는 그림’이 된다. 그리고 그 머묾의 시간 속에서, 빛은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위클리피플>은 서해경 작가의 예술 세계를 따라가며, 그가 지켜온 느림의 미학과 내면을 향한 시선을 차분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취재·글_김유위 기자

템페라와의 조우, 예술의 방향성이 바뀌는 결정적 만남

서해경 작가의 예술적 여정은 하나의 ‘경계’에서 출발했다. 1991년, 한·중 수교 이전 대사관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 베이징에 머물며 그는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이 되었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시작된 유학생활은 그에게 일찍이 ‘눈으로 보기보다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감각을 안겨주었다.

학부에서 전공한 산수화는 자연을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정신과 사유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동양 회화의 핵심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이후 대학원에서는 벽화과에 진학해 유화와 칠화, 부조, 도자, 공필화 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기법을 폭넓게 탐구했다. 특히 공필화는 한국에서는 거의 맥이 끊긴 기법으로, 과거 임금의 어진을 그리던 정밀한 전통 채색화 방식이다. 그는 이 기법에 깊은 애정을 품고 몰두했지만, 예술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만남은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대학 내 화랑에서 열린 한 전시에서 마주한 템페라 작품은 그의 감각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매끄러운 화면 아래 겹겹이 쌓인 색의 숨결, 그리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평온함. 그 작품은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시간과 신성을 머금은 하나의 ‘공간’처럼 다가왔다.

“처음 템페라 작품을 마주했을 때, 화면은 마치 빛을 머금은 보석처럼 느껴졌습니다. 화려하지 않은데도 깊이가 있었고, 소리 없이 고요한 울림이 전해졌어요. 무엇보다 설명하기 어려운 평온함이 제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그 순간, ‘아, 내가 찾던 회화의 언어가 여기에 있구나’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사진=마음의 창 2502, 템페라, 25cm X 31cm (2025년)


이후 그 템페라 전시를 열었던 작가가 벽화과에 초빙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이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공필화를 전공하려던 계획을 내려놓은 채 템페라로 전공의 중심을 옮겼다. 중세로부터 수천 년을 건너 이어져 온 이 기법의 역사성과 수행에 가까운 태도를 요구하는 작업 방식은 그의 예술관과 깊이 맞닿아 있었다.

느림의 축적, 마음 수행에 가까운 회화

템페라는 빠름과는 정반대의 회화다. 그림을 그리기 전, 먼저 ‘그림을 위한 땅’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된다. 나무판에 면천을 씌우고, 석고와 아교를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열두 번 가까이 반복하고 고운 사포로 면을 다듬는 인내의 시간이 거친 뒤에야 비로소 색을 올릴 수 있다.

“템페라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마음부터 가다듬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나무판에 천을 씌우고, 석고와 아교를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호흡이 느려집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아기 피부처럼 보드라워졌을 때, 비로소 그림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받습니다. 일련의 과정이 때로는 고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색이 쌓이고, 호흡이 쌓이며, 마음 또한 함께 쌓입니다. 그래서 템페라는 저에게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한 점의 그림에 시간을 새기고 마음을 새기는 가장 본질적인 예술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안료와 계란 노른자를 섞어 만든 물감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색의 생명력을 지닌다. 그는 먼저 최종 색의 보색을 아주 얇게 깔고, 그 위에 투명한 색층을 조금씩 쌓아 올린다. 여러 겹의 색이 차분히 축적될수록 밑색은 은은하게 드러나고, 화면은 깊고 고요한 빛을 머금는다. 이는 단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되는 효과가 아니라, 오랜 시간과 집중이 축적된 결과다.

2007년, 서해경 작가는 ‘행복 나누기’라는 부제로 첫 템페라 개인전을 열었다. 같은 해 코엑스에서 열린 색채아트페어 부스전에서는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중국 유학 시절 그는 다양한 기법을 탐구했지만, 대학원 졸업 당시 템페라로 완성한 작품을 선보인 이후 그의 예술의 중심은 언제나 템페라였다.

사진=마음의 창 2503, 템페라, 25cm X 31cm (2025년)


“저에게 템페라는 단순한 재료나 기술이 아닙니다. 시간과 빛, 그리고 마음을 한 화면에 겹겹이 쌓아 올리는 가장 진실한 예술적 언어입니다. 그래서 첫 개인전 이후 제 모든 전시는 자연스럽게 템페라로 이어졌습니다. 앞으로도 그 깊은 울림과 섬세한 표현을 담아내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계획입니다.”

‘마음의 창’, 내면을 바라보는 회화

최근 전시의 부제는 ‘마음의 창’이다. 젊은 시절 오롯이 ‘나의 행복’을 중심에 두고 작업하던 서해경 작가는, 삶의 여러 전환점을 지나며 ‘타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 위에 차곡차곡 쌓인 시간은 이번 작품들에 한층 더 서정적인 깊이를 더했다.

“그림을 시작해야겠다는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기보다,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저는 그 찰나를 ‘안내받는다’라고 표현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처럼 느껴지는 이끌림을 따라 붓을 들 때, 오히려 제 의지를 내려놓고 흐름에 맡기게 됩니다. 이번 전시의 주요 모티프는 꽃입니다. 제가 꽃을 그린다고 해서 꽃의 이름이나 형태를 재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실제로 그리고 있는 것은 꽃이 아니라, 그 꽃을 통해 드러나는 제 마음입니다.”

“꽃은 마음을 비추기 위한 하나의 창이자 매개일 뿐이죠. ‘마음의 창’에 담긴 작품들은 바로 그 이끌림을 따라, 제가 마음으로 바라본 꽃과 자연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결과물입니다. 화면 속 꽃과 자연은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결국 제 마음속 풍경의 반영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제게 설렘과 깊은 행복을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저는 충분한 치유와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제 그림 앞에 선 관람객들 역시, 제가 느꼈던 그 빛나는 깨어 있음의 순간과 조용한 마음의 울림을 함께 느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 전시 ‘마음의 창’을 통해 나누고 싶은 가장 큰 바람입니다.”



이번 전시는 정통 템페라 이콘화부터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창작 작품까지, 템페라의 본질을 더욱 깊이 탐구한 결과물이다. 서해경 작가는 정통의 깊이를 지키면서도, 울림을 확장하는 길을 꾸준히 모색해 왔다. 그의 화면 속 꽃과 자연은 외부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 풍경의 반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조(觀照), 즉 존재의 본질을 마음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한다.

치유를 향한 예술의 확장
티케이병원과 이어진 뜻깊은 인연

서해경 작가의 작업은 오래전부터 치유의 공간 속에서 조용히 이어져 왔다. 2017년 분당 판교에 티케이정형외과 개원 당시, 4층 병실과 2층 외래 공간에는 벽지용 특수 한지 위에 그려진 서해경 작가의 작품(모란과 나비)이 설치되었다. 행복을 상징하는 ‘모란’과 부활을 의미하는 ‘나비’를 담아낸 이 작업은, 병원이라는 일상의 공간에 예술을 들이기 위한 쉽지 않은 시도였다.

또한, 템페라 기법으로 완성한 꽃 그림 네 점이 분당티케이병원의 진료실(재활의학과, 근전도실, 내과, 재활통증의학과)에 걸렸다. 진료실이라는 가장 밀도 높은 의료의 공간에서, 이러한 작품들은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잠시 숨을 고를 여백을 건넬 것이다. 이번 위클리피플 신년특별호 신지식인 커버스토리 발간과 더불어 이를 병원 외벽에 전시하는 결정 역시 이러한 인연의 연장선에 있다. 예술과 의료가 함께하는 공간을 꾸준히 지향해 온 티케이병원의 철학을, 도시의 풍경 속에 조용히 드러내는 장면이 될 것이다.

한편, 서해경 작가의 남편인 서용 교수(동덕여자대학교 회화과, 한국돈황학회 회장)는 정목 스님이 이끄는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모임, 아노모’의 창립 멤버로 김태균 대표원장(티케이정형외과)과 뜻을 함께해 왔다. 이 만남은 예술과 삶, 그리고 노년의 시간을 성찰해 온 또 하나의 연결고리로 남아 있다.

사진=티케이정형외과 내부에, 서해경 작가의 작품(모란과 나비)이 걸려 있다.


기술의 시대, 인간성을 회복하는 예술의 역할

포스트 팬데믹과 4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일상을 급격히 변화시키고 있다. 서해경 작가는 이러한 시대일수록 문화예술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 확신하며, 예술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가장 근원적인 통로가 될 것이라 믿는다. 특히 공간을 변화시키고 일상 속에 스며드는 예술은 도시재생, 공공미술, 공간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AI를 비롯한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아날로그적 감성과 정서적 공명을 갈망하게 됩니다. 이때 벽화나 템페라와 같은 전통적 기법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깊이와 영혼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커질 것입니다. 기계가 모방할 수 없는 ‘손의 온도’와 ‘시간이 쌓인 질감’이 인간에게 주는 울림은 앞으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다는 서해경 작가는 모험을 즐기고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일에 늘 설렘을 느꼈다고 회상한다. 아버지의 부임으로 케냐에서 생활했던 경험은 그의 감각을 일찍이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그는 그런 순간들을 오래 바라보며 자신만의 상상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마음공부를 통해 체득한 ‘바라봄(watching)’의 태도는 오늘날 그의 예술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예술의 길은 어느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외로운 여정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순수하고 자유로운 길이기도 합니다. 예술은 ‘잘하는 것’보다 ‘오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그 모든 시간이 결국 작품을 깊게 만드는 토양이 됩니다. 예술은 스스로의 마음을 듣는 일입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유행보다,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작은 속삭임을 먼저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 미세한 울림을 따라가다 보면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기법이나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성, 즉 ‘왜 그리는가’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태도입니다. 예술은 사유의 중첩이자 마음의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제가 그린 꽃과 자연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제 마음의 풍경이자 내면의 진실을 담아낸 상징입니다. 청년 예술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술 앞에서 조급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술은 경쟁의 세계가 아니라 ‘성장’과 ‘깊어짐’의 세계입니다. 스스로에게 시간을 허락하고, 삶을 더 많이 경험하며, 끊임없이 ‘바라보는 법’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을 사랑하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길 바랍니다.”

사진=아브라함의 환대, 템페라, 34cm X 41 cm (2025년)


마음이 머무는 그림을 위하여

서해경 작가가 추구하는 목표는 단순하다. 마음이 머무는 그림을 오래도록 그리는 것. 정통 템페라가 지닌 영성적·명상적 특성을 현대적 감성과 잇고, 느린 시간 속에서 빛을 차분히 쌓아 올리는 예술을 이어가는 일이다. 그에게 그림은 완성을 향한 목적지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가깝다.

“제 그림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쉼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림 한 점 앞에서 잠시 멈춰 서서, 이유 없이 고요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고,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은 사람을 설득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바라보게 해주는 거울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템페라의 느린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빛과 색은 그렇게 보는 이의 내면으로 조용히 스며들며, 각자의 삶에 맞는 속도로 오래 머문다. 서해경 작가는 오늘도 마음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묵묵히 색을 쌓아 올린다. 서두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바라봄’의 태도로 이어가는 작업. 내면을 향한 그 고요한 여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느린 빛의 축적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작가 서해경의 작품 위에서 조용히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사진제공_서해경 작가

profile

1972년 출생. 1991년 한·중 수교 시기에 대사관에 부임한 부친을 따라 중국 북경에 유학했다. 중앙미술학원 국화과에서 전통 산수화를 전공하였으며, 이후 동 대학 벽화과에서 템페라 기법을 중심으로 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2007년 삼청동 리씨갤러리 전관에서 민화를 모티브로 한 템페라 회화 개인전 《행복 나누기》를 개최하였다. 같은 해 코엑스에서 열린 컬러엑스포(Color Expo)에 참가하여 대상을 수상하며 템페라 기법을 현대적으로 확장한 작업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여성작가회 부스전을 비롯하여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며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2025년에는 인사동 이즈갤러리에서 정통 템페라 기법에 기반한 이콘화(icon painting)와 템페라 기법을 활용한 창작 회화를 중심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작가는 동서양 회화 전통의 접점에서 ‘템페라’라는 고전적 매체의 조형적 가능성과 현대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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