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복쟁이입니다” 50년 맞춤양복 장인의 ‘살아감’에 대한 이야기
장준영 봄바니에 대표
이 이야기는 올해로 맞춤양복을 만든 지 50년째에 이른 장인(匠人)의 삶이다. 그가 풀어놓은 얘기들은 1960~70년대의 추억 속 풍경부터 수년 내에 다가올 새로운 미래의 모습까지 자그마치 반 백 년을 넘나드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오가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삶에 대한 뜨거움과 자부심으로 평생을 한 길만 걸어온 그이기에 전할 수 있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서울에서도 수제양복 명품거리로 유명한 소공동, 그곳에 가면 여전히 초크를 손에 쥔 채 환한 미소로 손님들을 맞이하는 복장업계 장인 ‘봄바니에’ 장준영 대표가 있다.
취재/글_ 오미경 기자 news@weeklypeople.net (제보)
● since 1971. 봄바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 롱런의 비결”이라며 지나온 시간을 대수롭지 않게 설명하는 그였지만, 사실 장준영 대표는 누구보다 장인(匠人)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천생 ‘양복쟁이’다. 1966년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시립직업전문학교에서 양복 부문 정규과정을 이수하며 이 분야에 뛰어들어, 1977년 현재 사업체의 모체인 코스모스 양복점을 인수받아 새롭게 문을 열고, 2005년 상호를 봄바니에로 개명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50년이란 세월을 업계에 몸담아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아 본 적이 없을 만큼 이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그 투박한 성실함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장 대표는 ‘봄바니에’의 오랜 역사의 배경을 묻는 질문에 ‘기본’이란 답변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어떤 일이든 기본에 충실했을 때 진가가 발휘된다고 봐요. 옷을 만드는 일만큼 나에게 재밌고, 보람되고,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없었기에 내 전부가 된 이 일을 함에 있어 스스로 늘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 대표의 마음가짐은 그가 만든 결과물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어떻게 하면 ‘맞춤양복’이란 것에 더욱 걸맞게, 옷을 좀 더 잘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매일같이 고민하고 연구했던 그는 치수를 재는 일에서부터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신체 사이즈더라도 사람마다 다른 체형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 진정한 맞춤양복을 제작할 수 있다고 판단해 손님의 체형을 정확한 형태로 남겨두기 위한 측정도구만 10여 가지를 개발했고, 양복 버튼, 바지의 허리선, 슈트의 깃 등에서 차별성을 만들며 그만의 맞춤양복 제작 매뉴얼을 하나씩 채워갔다. 이것은 단지 기술의 정교함만이 아니라 ‘고객의 몸에 가장 잘 맞는 옷을 만들겠다’는 맞춤양복 제작의 기본 정신을 차곡차곡 숙성시킨 결과였다. 그는 지금도 경험으로 얻은 느낌만으로 옷을 만들기보다 일일이 남겨놓은 고객들의 체형사진과 그들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체계적이고 섬세하게 맞춤양복을 만들고 있다.
● 기본에 충실한 노력으로 웨딩업계 가격 거품 빼내
맞춤양복을 만드는 장 대표의 고집스러운 노력은 또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1990년대에 웨딩업계로부터 러브콜도 받았던 그는 주먹구구식의 흐름에 놓여 있던 웨딩업계의 가격 거품에 심각성을 느끼고, 이를 바꿔보리란 생각으로 업계에 뛰어들어 고품질의 옷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결혼식이라는 중요한 자리를 떠올릴 때 남성의 의복을 대하는 가치관에도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며, 드레스에 비해 신경을 쓰지 않는 턱시도를 살리는데 중점을 두고 봄바니에 웨딩을 이끌었다. 옷을 향한 그의 이런 진심 어린 자세는 고객의 신뢰와 지지를 얻으며 꾸준히 사업을 성장시켜 봄바니에 사옥을 세우는 결실로 이어졌다.
● 시스템화 통해 기성복 가격으로 맞춤양복의 질을 구현하다
풍경 좋은 남산 기슭에 자리한 봄바니에 사옥에는 장준영 대표의 오랜 꿈 하나가 더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맞춤양복의 대중화’를 위한 바람이다. 장 대표는 우리나라의 맞춤양복 산업이 소위 사양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던 원인인 옷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의 분위기를 아쉬워하며, 그 속에서 품게 된 자신의 또 다른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1970년대만 해도 동네엔 양복점이 흔할 정도로 호황기였고, 외국의 유명 인사들도 한국에 들르면 양복부터 맞추러 갈 만큼 한국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맞춤양복 기능인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80년대 중후반부터 기성복에 밀린 양복점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국가에서도 기술을 점점 방치했어요. 심지어 지금은 나라가 세운 직업학교에도 신사복과가 없는 실정이죠. 그러는 동안 고객에게는 기성복에 대한 염증도 찾아왔고, 수입 명품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한다는 실망감도 생겨나며 새로운 니즈가 만들어졌습니다. 바로 ‘가성비’죠. 고객들의 변화를 지켜보며 저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기성복 가격으로 맞춤양복과 같은 수준의 만족도를 느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고, 그 Key를 ‘맞춤양복의 대중화’, 즉 ‘시스템 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 평생 옷을 지어 온 사람으로서 그는 고객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싶다는, 그래야만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게다가 더 이상 전통적인 맞춤양복 제작 방식으로는 분야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서, 어쩌면 지금이 변화를 시도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하게 되었다고.
이처럼 일찌감치 맞춤양복의 시스템화에 대해 고민한 장 대표는 그 출발지점으로서 이미 10여 년 전 ‘봄바니에 뉴욕’이란 이름의 브랜드를 론칭해 사옥에 입점시키며, 질 좋은 맞춤양복을 부담 없는 가격으로 만나볼 수 있도록 운영해왔다. 그리고 최근엔 그간의 테스트 노하우를 집약해 본격적인 시스템 사업을 위한 모든 매뉴얼 작업을 마침내 완성시켰다. 특히 지난 6월 리뉴얼을 통해 시스템화에 최적화된 공간구도로 탈바꿈한 봄바니에 매장에서는 소비자들이 자주 애용하는 만큼 가장 까다롭게 고를 수밖에 없다는 와이셔츠 역시도 최상의 제품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맞춤양복의 시스템화를 오랜 시간 준비해온 장 대표는 “서두르기보다 먼저 시스템화의 의미를 소비자들에게 제대로 각인시키고 싶다”라며, 이를 위해 옷 설계사들을 두는 개념으로 영업망을 구축해 나갈 계획이라 전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맞는 옷을 제대로 입는 일에 대한 가치를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옷은 나를 나타내는 최후의 메이크업, 교육으로 나누고파
장준영 대표는 옷을 ‘종합예술’이라 말한다. 단지 몸을 보호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을 겉으로 드러내는 수단이자 종합적인 이미지 구현책이 된다는 의미에서다. 하지만 그는 옷을 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의 인식이 무지와 무관심에 머물러 있어, 결과적으로 의복 산업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흔히 피부 관리에는 크고 세심하게 관심을 쏟으면서, 정작 그것을 감싸는 옷은 그저 브랜드만이 그 가치의 전부인 줄 아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결코 비싼 명품을 입는다는 게 아니에요. 나에게 맞는 모양과 컬러의 옷, 나의 장점을 잘 살리는 옷을 입었는지를 뜻하는 거죠. 자신을 드러내는 최종적인 내용물이니 모르면 전문가에게 물어서라도 알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봐요. 옷을 입는 사람이 옷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입어야 만드는 사람도 더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가지게 되거든요. 어떤 것이 좋은 옷일지 고민하며 만드는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은 차원이 다릅니다.”
장 대표는 특히나 수제양복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식이 현저히 약해 이 분야의 인력 양성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문제로 지적했다. 명실공이 과거 세계 기능올림픽 14연패에 이르는 대기록을 세운 신사복 강국이지만, 여성복에만 초점을 맞춘 교육 환경으로 변하면서 시장의 명맥을 제대로 이을 수 없게 된 것에 그는 답답함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이에 장 대표는 몇 년 전부터는 직접 교육 활동까지 나서고 있다. 서울여대 의류학과에서 그는 현재 38주차 특강 과정으로 남성 테일러링을 지도해오고 있으며, 명지대에서는 채플시간을 통해 옷에 관련한 몇 차례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밖에 기업체의 임직원들을 대상으로도 현장 전문가로서의 지식을 전하고 있다. 장 대표는 자신의 이러한 노력이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사명감과 같다고 말한다. 과거 나라의 혜택 덕분에 기술을 훈련할 수 있었던 그이기에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가진 역량을 다중화 시키고, 기회가 되면 더 많은 이들에게 옷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50년 동안 손에서 초크를 내려놓지 않았던 장준영 대표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크리스천이지만 지금껏 일요일도 쉬어본 적이 없다는 양복쟁이 장 대표는 무엇보다 이 일로 말미암아 얻은 경험들에 감사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상황으로 인해 오히려 자신의 삶이 단 하나의 길로만 우직하게 흘러왔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옷을 잘 입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라 덧붙였다. 물론 현장도 그의 몫으로 남겨둘 것이다.
오래된 흔적, 그곳의 오래된 이야기는 이따금씩 살아가는 것과 사라지는 것에 대해 반추해 보게 한다. 소공동을 꽉 채웠던 양복점들은 하나둘씩 사라져 갔지만, 봄바니에를 꽉 채운 장준영 대표의 열정만은 영원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profile.
1967년 서울특별시 시립 직업보도원 양복과 수료
1971년 코스모스 양복점(명동) 개점
1992년 봄바니에 웨딩 창업
봄바니에 양복점으로 상호 변경
보막스 뉴욕 창업(現 봄바니에 뉴욕)
1981년 국가기능사 자격 1급 취득
1989년 여의도 순복음교회 장로장립
2000년 아리랑TV 국제방송 고문, 경인방송 사업팀 자문위원
2007년 자랑스런 한국인상 수상
2009년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원(졸)
2013년 서울여자대학교 의류학과 테일러링 지도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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